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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3 17:19

한 달 쯤 전,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서른여덟이나 먹어가지고 하는 늦깎이 결혼식이라 안 가면 섭섭해할까봐 열일 제쳐두고 갔는데, 열일 제쳐두고 가길 다행이었다. 영화담당 기자인 친구의 직업 탓에 유명 여배우들의 얼굴을 쏠쏠히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힐끗힐끗 식사를 하는 여배우들의 얼굴이나 쳐다보다가 식이 끝났다. 나와 친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식이 끝나자마자 식장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햐~, 그 여배우 예쁘더라. 영화에선 그렇게 안 예뻤던 것 같은데”, “여배우는 여배우야. 후광이 막~.” 등등의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며 혹시라도 또 아리따운 여배우가 지나갈까 사람들로 가득한 식장 앞 주차장을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그 사이에서 굉장히 낯익은 사내의 얼굴이 지나갔다. 어디서 봤더라. 누구더라… 할 것도 없이 단번에 알아챘다. 윤호였다. 조윤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네 친구. 그래, 그 녀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려 19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녀석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느낌. 윤호는 날 멍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찡그리며 웃었다. 확실히 그 녀석이었다.

그 녀석과 내가 처음 알고 지내기 시작한 건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중학교 1~2학년 즈음 부터였다. 내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 세탁소집 아들이었던 윤호는 늘 집 앞 문방구나 동네 오락실에서 마주치는 녀석이었지만 중학생 시절 같은 반이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른다고 할 수도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대면대면한 관계. 대충 듣기로 녀석은 꽤나 일본통이어서 만화나 애니메이션, 일본 음악에 빠져 지낸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별 관심도 없었고 당시는 ‘오덕’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으므로 윤호가 왕따의 대상으로 주목받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윤호는 윤호일 뿐이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집 앞 독서실에서 오후의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독서실이라는 것이 예의 그렇듯 공부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학교를 파한 동네 친구들의 집합소로서의 역할이 컸다. 우리들은 독서실 휴게실을 아지트삼아 함께 TV도 보고, 몰래 담배도 피우고, 의미 없이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독서실 지하에는 오락실이 있었고, 그 오락실을 먹여 살리는 과반수의 아이들은 독서실의 소년들이었으며, 그 소년들 중에는 윤호도 있었다. 그러니까, 윤호와 내가 본격적으로 알고 지내기 시작한 건 아마 그쯤부터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이 관계의 시작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어쩌면 ‘우리가 본격적으로 알고 지냈다’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내가 본격적으로 녀석에게 접근했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고등학교 2학년인 시절, 혜성처럼 나타난 동네의 스타였으니까. 모든 아이들이 윤호를 추앙까진 아니더라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초중딩들은 모두들 윤호를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그 전까지 ‘감성적 오덕’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을 온 몸으로 보여주며 거의 투명인간에 가까운 무존재감으로 살아가던 이 세탁소집 아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단숨에 우리 동네 실시간 검색어 1위 같은 존재로 등극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윤호는, <스트리트 파이터 2>라는 게임을 정말 미친 듯이 잘 했기 때문이다.

김양수 달리기 체력장 생활의참견 김양수미투데이 페이퍼 PAPER 뉴발란스 네이버웹툰

내 친구 윤호는 <스트리트 파이터 2>의 고수였다


상대방의 머리 위로 점프하며 순식간에 필살기를 펼쳐 적으로 하여금 주먹 한 방 내지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만드는 그 녀석의 기술은, 그래 마치 그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연주하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손놀림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녀석은 단순히 상대방과 싸워 이기고 지는 대전액션게임을 통해 인간 중에도 신의 영역까지 다다른 인물들은 분명히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단순히 게임 하나 잘 한다고 동네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당시의 분위기는 그랬다. 온 동네의 수많은 아이들이 저녁밥만 먹으면 오락실로 달려가 줄을 서가며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하며 자웅을 겨루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여섯 개의 버튼을 두드리는 와중에 윤호가 오락실에 들어서면 일순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자기들도 모르게 윤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길을 터주었으며, 이미 내 차례가 오기를 10분 이상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윤호가 게임기 앞에 다가오면 순순히 자리를 양보해주는 아이들마저도 생겨났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윤호에게 그의 필살기를 배우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가끔씩 원정을 오는 다른 동네 <스트리트 파이터 2> 고수에게 맞설 우리 동네 대표선수이기에 나름대로의 예우를 해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픽 하고 웃음이 날 일이지만, 그때는 왜인지 참 진지하게 철이 없었다. 당시 우리는 무려 열여덟 살의, 턱에 수염이 보송보송 난 녀석들이었으니까.

“사실 난 네가 좋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어. 중학교 3학년 때 너희 반에 혼자 살던 약간 바보 같은 녀석 있었잖아. 우연히 지나가다가 네가 그 녀석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넌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어.”

어느덧 오락실에서의 인연으로 친해져 함께 집까지 오는 사이가 된 윤호가 문득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 내가 그 가난하고 바보였던 친구에게 어떤 도움을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이 다소 낯 뜨거운 멘트는 윤호가 날 진정으로 친구로 받아들이겠다는 어떤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었냐는 내 질문에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모호한 미소만을 남겼다.) 그리고 이 선언(?)을 한 날을 기점으로 녀석은 날 급격하게 가깝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락실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하면서 맞은편에 앉은 이름 모를 녀석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있을 때면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대신 스틱을 잡고 상대방을 피떡으로 만들어주기도 했고, 자신의 집(엄밀히 말해 세탁소 건물 뒷집)에 날 초대해 그간 자신이 모아둔 일본 애니메이션 잡지와 만화책,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일본 히트곡들이 담겨진 카세트테이프 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건 요즘 일본에서 절정의 인기를 끄는 노래야. 나도 이 노래 구하려고 명동까지 갔다 왔어. 참고로 말이지, 일본 노래는 좀 비싸더라도 일제 크롬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게 상식이야. 일본 노래는 일본 공테이프에 최적화되어 있거든.”

묘하게 비논리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녀석의 진지한 대화들을 들으며, 나도 어느 정도는 녀석이 심취한 일본 문화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건, 녀석의 그림솜씨였다. 녀석은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면서 작년에 쓰던 두툼한 국어 교과서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페이지를 화라라락 하면서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안에서는, ‘메칸더 브이’가 출동하여 무릎에서 상어미사일을 쏘고 있었다. 그렇다. 보통 아이들이 교과서 페이지의 한쪽 끄트머리에 만들던 졸라맨 같은 움직그림을 이 녀석은 당장 TV에 방송시켜도 문제없을 것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난 진심으로 감탄했고, 그 녀석도 뿌듯한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녁 먹고 갈래?”

글과 그림 /김양수(만화가 & 칼럼니스트)

어린 김양수군은 저녁을 먹고 갔을까요, 아니면 그냥 집으로 갔을까요?
다음 주 10일(금), 김양수의 <윤호와 나, 그리고 달리기> 제2화. 니가 내 마음을 알아? 편이 이어집니다. 기대해 주세요~!


Happy-go-lucky 첫번 째 작가 소개

 
김양수 (만화가, 칼럼니스트)

출   생 1973년
데   뷔 1998년 만화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경   력 2005~2009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
           2008.02 네이버 웹툰 '생활의 참견' 연재
           1997~2009 월간 PAPER 기자
대표작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생활의 참견>,
           <김양수의 음악의 재발견>, <시우는 행복해>
저   서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생활의 참견>(애니북스, 2005년), <중학생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한자
            만화 교과서>(스콜라, 2007년), <생활의 참견 New Season 1>(소담출판사, 2009년), <생활의 참견
            New Season 2>(소담출판사, 2010년)
사이트  미투데이 http://me2day.net/mup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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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ewbal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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